2024-02-04
이여운
2020. 파사드 프로젝트 Façade Project/ 차경림(평론)
“역사는 야누스처럼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과거를 보고 있든 아니면 현재를 보고 있든
역사는 같은 것을 보고 있다.”
-Maxim Du Camp_[파리]
과거는 죽은 시간이 아니라 현재와 대화하려는 시간이다.
샤르트르, 노트르담 고딕 성당과 크라이슬러, 엠파이어스테이트 마천루 빌딩, 경복궁, 광화문, 시청과 서울역은 각기 다른 역사와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공간 개체이다. 건축물과 건물은 현대로 오면서 혼용하여 쓰게 되었지만 많은 정의들 중에 N.페프스너는 간명한 말로 “사람이 들어가는데 충분한 넓이를 갖춘 것은 모두 건물이지만, 건축이라는 말은 미적 감동을 목표로 설계된 건물에만 사용된다.”라고 구분하고 있다. 작가 이여운이 먹으로 옮기는 고딕성당과 뉴욕의 마천루 빌딩들, 조선시대 궁과 성문, 그리고 근대 서양식으로 지어진 공공건물들은 그런 의미에서 모두 건축물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전도 그렇거니와 특히 중세 고딕 성당은 신이 거주하는 곳으로 ‘천국’의 알레고리였다. 하늘을 향한 신앙심의 표상인 높이 경쟁과 신이 주재하는 천상의 광휘를 보여주기 위해 플라잉 버트레스 공법과 스테인드 글래스 유리 공법 등의 개발은 예술과 수학과 과학 그리고 돈과 기술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며 이루어진 성과였다. 성당은 당시 기독교 문화에서는 제의뿐 아니라 모든 공동체 사회활동이 이루어지던 장소적 특징을 갖고 있던 곳이기에 공간의 부분들은 그러한 용도에 맞게 설계되었고 정면 혹은 입면의 파사드 부분은 광장이나 거리에서 접근하는 사람에게 시각적인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성당의 인상으로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에서도 역시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파사드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 어휘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대로 들어서면서 파사드는 상실된다. 콘크리트와 철의 사용이 본격화되면서 파사드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붕괴되는데 즉, 건물의 기능 강조가 건물의 성격을 특징 지워주는 의미 체계를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현대에 와서 상실되었던 파사드의 개념을 다시 도입하여 과거의 구성 요소인 파사드의 의미 체계를 강조하였고 그렇게 구축된 대표적인 건물들이 뉴욕을 대표하는 마천루 빌딩인 크라이슬러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다. 조선시대 궁궐 역시 궁으로 출입하는 각각의 출입문들이 있고 그 문들은 각기 다른 용도와 상징성을 미적으로 표현했었는데 파사드의 역할과 같다. 경복궁의 광화문이 그 예이다. 또한 시청, 서울역은 일제 시대에 구축되어 부분적으로는 근대적 건물의 성격을 띄기도 하지만 대체로 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건축물로서 파사드가 존재한다.
이렇듯 이여운의 수묵화를 이야기하기 앞서 건축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여운의 수묵화가 예술작품인 건축물을 자신의 예술 소재로 삼았다는데 방점이 있다. 천국의 상징이 흘러넘쳤던 건축물에서 신성과 제의의 이데올로기는 사라졌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금 여기서 바라보는 성당 건축물은 아우라를 간직한 채 전시 가치와 표면적 가치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혹자는 지난 시절 뉴욕의 마천루 경쟁을 값싼 현대 자본주의의 허상이라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과 기술을 바탕으로 한 하늘에로의 시적 표현이자 고대 판테온에 대한 유용한 절취라는 점에서 예술과 기술의 관계 전도로 폐허처럼 변했던 근대로부터의 탈출에 한해서 우리는 건물이 아닌 건축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 즉 미적 감동을 보는 것이다.
그의 수묵 건축물은 모두 정면도인 파사드를 위주로 그려진다. 파사드는 건축물의 얼굴이자 건축물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알레고리이며, 건축가의 독특한 미적 어휘로 구성된 예술작품이다. 그가 고딕과 르네상스, 바로크의 성당과 뉴욕의 마천루 빌딩, 그리고 우리의 궁궐과 근현대 건물을 소재로 전통 계화界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입체감을 드러내는 사실적 표현 없이 오롯이 그것들의 파사드 정면도만으로 아우라와 정면 승부하는 이유이다.
이여운 먹그림 번역의 실마리는 또한 형식의 층위에서 해석해낼 수 있다. 이여운의 수묵은 우선 전통적 화법인 계화界畵 Ruled-line painting에 뿌리를 둔다. 계화란 전통적으로 자尺를 이용하여 궁궐·누각·가옥 등 건축물을 정밀하게 묘사한 그림으로 섬세하며 입체감 있게 그리는 화법畵法으로 후에 합리적인 사실주의의 기법으로 정착되었다. 많은 연습과 함께 특히 세필細筆의 숙련이 필요함은 눈에 보이는 이여운 수묵의 시각적 정보만으로도 가히 짐작이 간다. 한편 이여운의 수묵은 계화의 형식을 가졌으되 자尺의 사용은 초기 그리드 작업 시에만 적용하며 보통 건축물 계화에서 보듯 부감기법과 측면도 등 투시 기법을 선택하지 않는 전통 계화방식과도 선원근법과도 다른 그만의 작업 방식으로 노트르담, 랭스, 아미앵의 성당 건축물들과 뉴욕의 대표적 마천루 빌딩들, 그리고 경복궁과 광화문, 서울역, 시청의 건축물을 구축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자신의 저서 [모스크바 일기]를 통해 세잔의 유난히 아름다운 그림 앞에서 ‘감정이입’이라는 단어는 큰 오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특별한 사유를 쏟아낸다. 즉, 그림을 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사람이 그림 공간 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림 공간이 바깥으로 밀고 나오는 것, 그림 공간 여기저기에서 특정부분들이 바깥쪽으로 밀고 나오는 것으로 그렇게 우리를 향해서 열리는 부분들에서 과거에 있었던 중요한 경험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것이다.
재현 대상으로서 이여운의 수묵 건축물이 그러하다. 그의 수묵화는 빼어난 투시와 부감, 채색과 음영으로 생성된 화폭 안 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하지 않는다. 대신 내 앞에 당당히 평면의 가면을 쓰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나를 향해 밀고 나오는 건축물의 파사드들은 모네의 루왕 대성당 연작처럼 빛으로도 나의 눈으로도 잡을 수 없는 신기루가 아니다. 한갓 과거 속에 파묻혔던 낡은 껍데기가 아닌, 꼬불꼬불 주름지거나 수직상승하는 문양이 되었든 신묘한 동물과 성자와 신들의 각인이 되었든 이여운의 파사드 알레고리는 현재의 나를 마중 나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중이다. 이여운은 건축의 어휘를 평면 회화의 어휘로 번역해 가는 번역자의 과제를 수행하며 가히 파사드 프로젝트를 수행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