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6
이여운
그 건물이 너를 바라본다! / 김병수 (미술평단 주간)
그 건물이 너를 바라본다!
김병수 (미술평단 주간)
수묵 건축, 투시도의 수묵화 혹은 ‘깔끔한’ 동양화. 이러면 이여운의 회화가 설명될까? 미적 술어로서 ‘깔끔한’이 지시하거나 함축하는 바가 무엇일까? 또 수묵화가 의미나 방법 그리고 미학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얼마나 될까? 근대의 <회화>제국이 건설한 식민을 벗어 나는 방식은 포스트모던, 제국주의 비판 그리고 신식민주의 해체 등일까? 탈식민의 회화성은 무엇일까? 전통과 봉건은 얼마만큼 거리를 두고 있을까? 탈봉건과 탈식민은 정말 전혀 별개의 사안일까? 이여운의 회화는 이러한 질문들을 감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담담하다. 어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건축과 기억 그리고 탈식민! 역사적이면서 실존적이다. 외교는 국제 정치라고 부를 수도 있다. 중심과 주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이다. 문화와 회화권도 마찬가지다. 윤두서의 자화상과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를 직접 비교 할 수는 없지만, 이여운을 통하면 가능해진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그린 건축물의 대개가 정면을 바라본다. 관람자가 응시하는 대상, 객체로서 회화가 배경과 선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형성된다. 다문화성만이 아니라 어떤 근현대의 역사성과 가닿고 만난다. 이 지역을 구확하는 능력은 오롯이 작가의 몫이다. 가끔 반영으로서 번짐 효과가 사용되는데 여전히 수묵이라는 매력으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의미이다. 기하학적이지는 않더라도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건축 도면이나 투시도 같은 화면 때문이다. 거기에서 또 배경으로서, 바탕과 선으로서 화면이 하나로 보여지는 대상으로 융합한다. 그런데 캔버스의 바탕이 그 건축물의 배경으로서 작동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배경과 선 안의 빈 공간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배경이 존재라면 선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그냥 미적 쾌감의 대상으로 수용 하면 될까? 그러면 관광지에서 기념으로 찍은 건축물로 취급해도 된다는 의미이다. 그럴 경우 석연치 않은 감정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심지어 다크 투어리즘까지 있는 정도인데! 역시 회화적 장치 때문이 아닐까? 현실 너머 이상으로서 세계에 대한 여러 모색을 거친 방식으로 그려내는 루트는 문화권마다 다르다. 그리고 그 회화권에도 중심과 주변이 있었다. 유럽에서도 그렇고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글로벌이라고 하는 전 지구적 상태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일어난다. 수묵에 대한 미학적 판단은 이미 결정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일부에서 다른 고민들을 하고 있다. 이여운도 그렇다.
한때 동서 비교미학이라는 말이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적이 있었다. 거기서 회화는 매체와 문화의 차이로 설명했다. 종이와 붓에 대하여 유화를 대응시켜 화법과 화론의 차이를 거의 일대일로 대응시켰다. 그러다 융합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약간의 강제성을 띤 절충을 시도했다.
이여운은 수목미학의 방식과 투시도법 그리고 봉건/식민/탈식민을 전통과 동시대적 감각으로 치환하는 방식으로 감당한다. 이것이 분명 학술 논문에서 다루어지는 형식을 띠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름의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작가가 다루어온 대상과 인터뷰에서 밝힌 기획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유럽에 대한 나름의 성찰이 그것이다.